굿바이 개그콘서트 (나에겐 개저씨 같았던)
그러고보니 2020년에는 개그콘서트가 폐지됐구나. 종영되면서 그 사실이 잠깐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고, 또 한편으로 아쉬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검새글 해보니 1999년에서부터 시작된다. 참 오래했다.
하지만 나는 이 개그콘서트의 개그에 좀처럼 웃지 못하는 존재였던 것 같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 프로그램의 개그 코드에 동의하기 힘들었다. 나아가 사람들이 그것을 소비하는 방식은 더욱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때로 많은 경우에 그것은 차력쇼 같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많은 경우 그것은 심히 폭력적이었고 가십적이었다. 아이들은 기가 막히게 그런 요소에 잘 반응했다. 그들은 원체 민감한 존재였다.
짓궂은 아이들은 개콘에 등장하는 우스꽝스러운 이들을 가지고 주변인들을 놀리곤 했다. 갈갈이를 닮았다. 옥동자를 닮았다. 이슈를 견인하는 이들의 언어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개콘을 봐야했다. 아니면 눈치라도 좋아야했지.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 덩달아 개콘에 빠져드는 아이들도 있었고, 나처럼 그냥 그러한 논의와 끝끝내 담을 쌓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때부터 내가 느낀 것은 웃음의 폭력성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웃음을 폭력적으로 소비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회의도 아주 깊고 길게 이어졌다. 그래도 그때는 학생이니까, 남자애들이니까 하며 이해하고 넘겼는데 대학에 가서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여기서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즐거움을 찾기 위해 가장 쉽게 가져오는 것은 개콘이었다.(물론 아무래도 대학이니만큼 훨씬 더 점잖은 방식이었다.) 나는 개콘이 우리 사회에 이렇게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더욱이 예전에는 그냥 상대하지 않는 것으로 외면할 수 있었는데 대학에서는 봉숭아 학당을 연기하게 되면서 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일단 이 개그프로그램은 인간의 외모에 대한 비하를 전제로 깔고 들어간다. 웃기는 사람이 있는데 생각해보니 이 사람의 외모가 못 생겼네? 라는 게 아니라, 웃기려면 못 생겨야 한다는 등식을 만들어 냈다. 그렇다보니 출연자의 외모의 희화하는 분장이 주를 이룬다. 못 생긴 사람은 더 못생기게 예븐 사람은 필요에 따라 못 생기게.
진지한 논의가 요구되는 사회적 이슈를 희화하는 경우도.. 그래서 그러한 논의에 진지하게 다가가는 일을 우습게 만드는 일도 있었다.
사람들을 폭력에 둔감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었고, 차별에 저항하기 보다는 그것을 외면하고 오히려 더욱 강화시키기도 했다.
생각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굳이 그런 식으로 웃어야 했는가? 웃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꼭 우리는 타인의 불행과 아픔을 가지고 웃어야 하는 걸까?
개콘을 위시해.. 기존의 슬랩스틱성 희화일변도의 개그를 볼 때마다 나는 마치 이렇게라도해서 웃으라는 듯, 웃음을 강요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강요에 마주해 외면을 해나가는 과정은 지난한 투쟁의 시간이었다.
내가 동의하면서 또 하년으로 동의하지 않은 어떤 지식인의 말을 빌리자면 유머의 코드라는 옷을 입고 제시되는 차별과 폭ㄹㄱ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면 최소한 하다 못해 그러한 유머가 제시됐을 떄 웃지 않는 성의는 보여야 한다. 나는 폐지될 때까지 많은 이들의 지지와 아쉬움을 낳았던 개콘이 제시하는 개그가 이따금 사람들로 하여감 몸서리치게 만드는 개저씨의 개그와 닮은 점이 있다고 생각했따.
방식은 다르지만, 각각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향유하고 있는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폭력적 가치관을 유머에 담아 강요하는 형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