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 역사는 쉽고 재밌어야 하는가? 대한민국이 사랑한 설민석에 대하여(그는 왜 그렇게 쉽고 재밌었을까)
망연자실까지는 아니었지만 허탈했다. 분명히.. 전날 저녁까지도 MBC에서 연예대상이 생중계될 때 매 파트마다 노미네이트된 후보들을 자기 특유의 재기 넘치는 제스쳐와 표정을 이용해서 소개해주는 모습을 보여주던 그였다. 그런 그가 하루 아침에 논문 표절 의혹으로 언론의 도마 위에 올랐고, 생각보다 너무나도 발빠르게 모든 방송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게 됐다.
문제는 ‘설민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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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다는 듯이 위와 같은 사설이 등장했고, 인터넷 공론장에서도 갑론을박이 이루어졌다. 논쟁들은 대부분 설민석은 원래 엉터리였다고 주장하며 그의 학사 학위를 들먹이는 이들이 한 쪽을 차지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래도 그의 설명이 쉽고 재미있었으며 그 덕분에 그나마 역사에 흥미를 가질 수 있었다고 주억거리는 이들이 위치했다.
[데스크에서] 설민석이 차라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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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까 이렇게 설민석에 대해서 상반된 사설이 또한 등장하는 것이다. (둘 다 조선일보라 참 이것 참 민망하기는 하지만 ㅎㅎ 이건 뭐 정치적 차원에서의 오피니언은 아니니까 약간 면죄가 성립하지 않을까. - 라고 생각했는데 두번째 기사는 설민석 사태에 편승해서 자신들 특유의 정치적 논조를 펼치는 기사구나 ㅎㅎㅎ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겠다.)
설민석의 역사 강의에는 ‘역사학’이 없다. 지금 시대에 역사학계가 지향하는 메시지가 결여돼 있으며, 그런 논의들을 제대로 소화하고 전달할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결국 그는 사람들이 듣기 거북하지 않고, 기꺼이 고개를 끄덕일만한 ‘지식’ ‘스토리’들을 뽑아서 쏟아냄으로써 기존에 다수의 대중들을 지배해오던 구태의연한 사회적 정서와 고루한 인식체계에 편승한, 말 그대로 ‘예능’을 해온 것에 불과하다. - [안정준·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
애초에 대중이 설씨와 김씨에게 열광한 것은 그들이 학위 과정에서 얻은 전문성보다는, 강의 내용을 듣는 이 귀에 쏙 집어넣어 감동을 줄 수 있는 탁월한 전달 능력 때문이었다고 봐야 한다. 강의의 질(質)보다 ‘예능감’을 우선시하고, 진지한 성찰 대신 사회적 정서에 편승한 담론을 재생산한 것은 사실 당사자와 사회가 그 책임을 함께 짊어져야 할 일이다. -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
나는 위의 문장들에 동감한다.
사실 대중은 설민석에 대해 실망할 자격이 없다. 그리고 그의 학위가 비난의 대상이 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학사 학위가 연극영화학이라는 것은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실이었다. 대학원에서 역사 교육을 전공했으니 그 정도면 그래도 역사를 가르칠 최소한의 문턱은 넘었다고 봐야 한다. 아마 지금 돌아가는 판을 보면 그냥 역사교육 학사나 석사 정도에 그쳤다면 '역시 학사 학위만 가지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비난받았을 것이다. 그냥 여론과 언론은 늘 그랬듯이 항상 물어뜯을 구실을 찾기 바쁠 뿐인 것이다.
그리고 애당초 대중과 미디어가 그에게 기대했던 것은 미처 발굴되지 않은 새로운 역사를 발굴해주는 것보다는 기존의 역사에 어떤 서사를 입혀서 맛깔나게 제시해줄 것인지의 여부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설민석을 사랑했다. 왜? 쉽고 재밌었으니까.
그래서 어느새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생각하게 됐다. '역사는 쉽고 재밌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역사를 가장 쉽고 재밌게 가르치는 것은 설민석이다.라고 너나 할 것 없이 주장하게 됐다.
그렇다면 이렇게 된 마당에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 것은 '그는 왜 그렇게 쉽고 재밌었을까?'라는 것이고, 그 반대편에 위치하는 '기존의 역사는 왜 그렇게 어렵고 재미없었을까?'이다.
일단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서사'의 힘이다. 설민석은 서사의 힘을 잘 이용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의 화법에 강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러한 화법도 서사가 없다면 어린아이에게 우쭈쭈쭈하는 것에 불과하다. 반면에 기존의 역사는 서사성이 부족하다. 그런데 왜 그럴까? 왜 기존의 역사는 서사의 힘을 십분 활용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 이유는 서사가 가진 단점 때문이다. 서사는 재미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맥락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역사학에서 이러한 단점은 치명적이다.
인간의 삶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간순간 온갖 사건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가 되는데 그러한 사건들은 또다시 자기들끼리 상호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히 복잡해질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온전히 서사만을 이용해서 제시할 경우 맥락이 단편화되는 것은 물론, 해석의 자유도가 상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다르게 볼 수 있지 않을까?하고 제시한 서사가 오히려 그 때문에 그 이상으로는 다르게 볼 수 없게 만드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너무나도 재미있고 너무나도 매력적인 서사 때문에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매장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재미와 매력은 듣는 사람들의 신념과 취향에서 기인한다는 게 또다른 문제다. 서사는 기본적으로 재미있다. 하지만 그것을 더욱 재미있을 수 있는 이유는 듣는 사람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해준다는 데에 있다.
설민석의 강의는 예능 프로의 숙명이겠지만, 소비 위주의 강의, 즉 사람들이 익숙한 주제를 선정하여,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방향으로 스토리라인을 구성하고 결론으로 이끌어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대중들에게 익숙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정서를 중심에 두는 가운데, 마지막 결론부에서 ‘올바른’ 역사관을 강조하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식으로 마무리한다. 나는 이런 형태의 내러티브를 대학 수시면접에서 수도 없이 목도했다. 어린 학생들은 학업계획서 내지는 자기소개서에 그 출처도 명확하지 않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문구를 매번 인용한다. 그리고 평소 관심을 가졌던 역사 주제로 주로 일제 강점기의 종군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왜곡, 강탈당한 한국 문화재의 반환 문제를 든다. 대부분 이 범위를 잘 벗어나지 않는다. 지금 현재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대국들 틈에서 그들의 역사왜곡에 분연히 맞서야만 하는 ‘약소국’인 한국의 상황을 강조하는 가운데,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올바른’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는 점, 주변국이 제시하는 논리에 현혹되지 않고, 스스로 이를 논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 등을 역설한다. 결론적으로 자신이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여 그 ‘올바른’ 역사관을 전달하는 ‘첨병’이 되겠다는 것이다. “그래, 자네가 존경하는 역사가는 누군가?” “설민석이요.” 이게 어찌 어린 학생들의 잘못이겠는가. 가르친 어른들 잘못이지. 일제 강점기가 끝난 뒤로 8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기성세대가 만든 국민교육 체계와 획일적인 민족주의 정서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위와 같은 ‘올바른’ 역사관의 강요가 지속되었다. ‘인문학’으로서의 역사학 본연의 목적은 온데간데없고, 역사란 현재의 이데올로기나 정치·사회·외교적 이해관계를 정당화하는 수단이라고 여기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있다. 역사 연구자는 당연히 ‘우리’에게 유리한 논리를 제공하는 데 복무해야 하는 존재이며, 어린 학생들이 ‘중국의 고구려사 귀속 주장’에 대한 대응논리를 달달 외워서 읊으면 훌륭한 역사관을 가진, ‘미래의 역사가’처럼 추켜세워졌다. 만약 그런 관점을 토대로 학생들에게 학습을 강요한다면 그것이 과연 ‘역사교육’인가, 아니면 ‘정신교육’인가. |
위의 지적은 매우 날카롭고 설득력 있으며 그래서 섬뜩하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정서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전체주의다. 과거 1930년대에 히틀러가 독일 국민들을 설득하는 데 사용된 이념이다. 현대의 천민 자본주의와 엘리트 중심의 대의 민주주의가 양산해낸 잉여 대중들은 이러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정서에 너무나도 쉽게 매료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이는 결국 우리 사회에서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는 경직된 태도로 이어지게 되고 사회 전반의 유연성을 저하시킨다. 짧게 본다면 유용하겠지만 기나긴 안목에서 본다면 사회 전반의 저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니까 설민석이 비판받아야 하는 지점은 그가 역사교육을 학부에서 전공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다. [역사], 아니 정확히는 [올바른 역사]라는 것을 내세워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무한 반복함으로써 우리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역사적 맥락을 마주함에 있어서 매우 경직된 자세를 갖게 했다는 점이야 말로 그가 비판받아야 하는 부분이다.(물론 논문 표절 의혹도 그것이 사실이라면 비판받아야 하는 부분이겠으나, 아직은 의혹에 그칠 뿐 그것이 증명된 것도 아니고, 그것이 사실로 증명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출판과 방송의 분야 걸쳐 해온 일들에 대한 비판과는 분리해서 다루어져야 한다.)
애초에 대중이 설씨와 김씨에게 열광한 것은 그들이 학위 과정에서 얻은 전문성보다는, 강의 내용을 듣는 이 귀에 쏙 집어넣어 감동을 줄 수 있는 탁월한 전달 능력 때문이었다고 봐야 한다. 강의의 질(質)보다 ‘예능감’을 우선시하고, 진지한 성찰 대신 사회적 정서에 편승한 담론을 재생산한 것은 사실 당사자와 사회가 그 책임을 함께 짊어져야 할 일이다. -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
나는 다시 한 번 이 문장을 소환하고자 한다. 이 사건은 설민석의 단독 행위로 결과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 전반에 팽배한 '무식함'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리 사람들은 '쉽고 재밌는 것'만을 찾는가? 이를 번역하자면 '왜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을 하는가?'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 열린 토론과 성찰의 문화가 아직도 자리잡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스스로 그리고 동료와 이웃과 충분히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 일단은 스스로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로 정리해 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권위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머리로 생각할 줄 아는 게 필요하다. 2015개정 교육과정을 위시한 미래교육과정이 추구하는 인재가 이와 다르지 않다. 이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차이가 미래 인재의 여부를 결정짓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어느 정도 직감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를 자꾸 망각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이들은 '왜 그렇게 진지하냐'고 말한다. 실로 다리에 힘이 풀리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하는 말이 결국 스스로가 설민석과 같은 이들을 탄생시킨 공범이라는 것 자인하는 줄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