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기부 잘 기록해주지 않는 선생님 대응법? 말세다 말세야.
생기부 잘 기록해주지 않는 선생님 대응법 - 에듀진 인터넷 교육신문
성적대로 갈 수 있는 곳보다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전형이 학생부종합전형과 논술전형이다. 이 중 학종은 3년간의 생기부 기록으로 학생을 평가한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생기부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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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지나가다가 에듀진이라는 교육신문에서 <생기부 잘 기록해주지 않는 선생님 대응버>이라는 기사를 접하게 됐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정말 자극적이기 이를 데 없는 기사다. 독자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공략'이라는 단어 대신 '대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는 했으나, 저렇게 박힌 타이틀의 이면에는 학생이 하기에 따라서 좋은 생기부를 얻을 수도 있고, 나쁜 생기부를 얻을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사실 나는 저런 기사의 논조라든지 사고 방식이라든지 세태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입의 절반이 수시로 결정되는 세상에서 수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학교생활기록부를 충실히 하고자 하는 건 당연지사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굴리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문제는 바로 생기부를 잘 기록해 주지 않는 선생님이고, 그러한 선생님을 양산한 제도에서 찾아야 한다. 듣자하니 학교라는 곳에는 무수히 많은 교사가 있지만, 그 교사들 중에도 참 종류가 천태만상인 모양이다. 어떤 누군가는 정말 열과 성을 다 해 교육에 임하는 반면, 어떤 이는 그저 학교를 월급 타가는 곳 정도로만 여긴다. 이러한 교육적 철학이 꼭 반드시 그대로 학교생활기록부 기록의 질로 연결되리라 단정짓고 싶지는 않다. 어쩌면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제대로 못 쓸 가능성도 크고, 대충대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사실은 정말로 좋은 생기부를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다.
갑자기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잘 기록한다.'라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학생의 잠재력을 잘 관찰해서 그것을 사실적으로 기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잘 못 기록한다는 것은 대충대충.. 천편일률적으로 그리고 식상하고 평이한 내용을 기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잘 풀린다. 그러니까 이 기사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교사들은 마땅히 학생의 특징과 잠재력을 잘 관찰해서 그것을 충실히 생기부에 기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작업이 쉬울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때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내가 오늘 하루 무엇을 했는지를 회상해 보면 좀처럼 잘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다. 보통 그런 상황에서 잘 기억나는 것은 무수히 반복되는 것들이다. 물론 새롭게 기억나는 것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보통 나에게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들이지, 학생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들인 경우는 많지 않다. 교사가 학생에게 관심을 가지고 학생의 의미를 두는 것이 함께 가치를 부여하는 사고관을 가져야 하는 게 일단은 중요해 보인다. 그런 것이 교사로서의 소양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 작금의 교육적 환경이 과연 교사로 하여금 학생의 특징과 잠재력을 온전히 기록할 수 있게 보장해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물론 해가 갈 수록 학급당 학생 수와 교사당 학생 수가 감소하고 있다. 저출산이 문제라고 하지만, 저출산이 가져온 긍정적인 효과 중 하나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이드 이펙트일 뿐이지 교육당국의 체계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보기는 힘들다.
위 기사를 인용하자면 학생이 질 좋은 생기부 기록을 얻기 위해 해야 하는 노력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 선생님과 소통할 것
- 활동의 과정과 결과물이 담긴 보고서를 선생님께 제출할 것
많지 않다. 이 정도다. 하지만 이 기사를 읽은 학생은 과연 '뭐야 굉장히 쉽네? 지금 당장 실천해야겠다.'라고 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학생에게도 쉽지 않다. 하지만 학생이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교사 역시 마찬가지로 쉽지 않을 것이다.
위에 바로 문제의 해답이 있다.
이를테면 현재 우리 학교 교육현장은 학생과 교사가 마음 편히 소통할 시간과 기회가 보장되어 있는가?
학교 현장은 마치 일하느라 바쁜 부모가 틈만 나면 아이들을 방치하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교사들은 어떻게든 아이들에게 다가가려고 하기 보다는 아이들로부터 멀어지려고 한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여전히 규율의 준수라는 내용으로 이루어지는 교사와 학생 간의 소통은 서로가 서로를 거부하거나, 쫓고 쫓기는 관계로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 많지 않다. 그리고 학생과 소통하고 상담한다고 해서 이 사회는 그러한 노고를 제대로 인정해 주고 있는가?
교사에게 학생의 결과물을 검토하고 생기부를 작성할 시간이 보장되고 있는가?
2015개정 교육과정이 도입되고, 아니 그 이전에 대입 수시 학생부 종합 전형 체계가 본격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교육현장 여기저기에서는 볼멘 소리 혹은 죽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이제는 세상이 그렇게 바뀐지 시간이 흘렀으니 다들 그냥 그렇구나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지만, 수업시수라든지 행정적인 업무는 줄어들지 않은채로 그냥 생기부 작성이라는 막대한 업무만이 얹어졌으니 쉽지 않다. 물론 이러한 변화를 빌미로 환경적 변화가 이끌어진 것도 있다. 교원의 행정업무 경감을 위한 노력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혜택은 과연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실질적으로 학교생활기록부 작성의 막대한 비중은 일선 담임 교사들에게 집중되고 있다. 일부 학교의 경우에는 그러한 부담을 인식하고는 담임 교사에게서 일괄적으로 행정업무를 배제해서 비 담임교사에게 몰아주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학교에서는 그러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교원 행정 업무 경감으로 인한 혜택은 비담임교사에게 집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