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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1일

by 통합메일 2019.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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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도 당장이라도 새로운 곳으로 모험을 떠나려하는 사람의 마음이 되는 일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때로 그것은, 아니 그것은 세상에서 결코 이해받지 못할 혼자가 되었으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존재하는 모든 것, 태어나는 모든 유무형, 소멸해가는 유무형의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낮에는(이라고 쓰지만 나는 내가 정확히 어떤 시간에 있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 중에서 어떤 것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외면하고, 또 어떤 것에 대해서는 선택적으로 집중하는 일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그러한 사고관의 어딘가에 그녀에게로 향하는 도(道)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그녀의 존재자체도 희미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하지만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규정해0버리느 여기서 언급되는 그녀의 존재성 자체가 지나치게 수동적인 것이 디ㅗ고 말기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내가 필요로 하고 경외로워하는 그녀의 필수적인 것들이 상당히 희귀하고 수고로우며 허용적인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를 허용치 않는단ㄴ 것은 분명히 그녀에게 있어서도 상당한 무미건조함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겠지만 하여간에 그러한 감수의 가능성이 함축하는 상당한 자율과 능동서잉 여하 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일단의 사건은 나를 지치게 만들고, 그녀에 대해 고민하고 걱정하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지만, 하여간의 상당히 엉켜버린 분노와 시기와 두려움과 답답함과 걱정과 불안과 안도와 그리움의 격정들 속에서의 사투 끝에 도달한 것은 <그러한 그녀>에게 도달하는 길 - 다른 말로 소중한 사람에 대해 지나치게 무뚝뚝하지 않는 일 - 또 다른 말로 하면 철들기 위한 새로운 합리적 처방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따.

발상은 단순하다. 진단부터 하자면 그러한 무뚝뚝함의 원인은 치열하게 합리성의 꼬리만을 쫓아가기 때문이다. 아니 뭐 그렇다고 해서 비합리성이 곧 참된 합리성으로 귀결된다는 식의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비합리를 추구해서 합리로 나아갈 수 있는 길 따위 있을리가 없다.

그저 세상에 존재하는, 선택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을 앞에 두며, 때로는 그 중의 일부에 대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눈을 감고, 또 일부에 대해서는 선택해서 집중하는 노력, 이러한 노력이 바로 <그러한 그녀>에게로 갈 수 있는 道가 아닐까?



찔끔거리는 독서에 그녀가 제 발을 저리는 순간이 있었다. 이미 나도 서서히 거진 생각을 완전히 바꾼 마당이었다. 그래서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수화도 좋지만 그녀의 손에 필담을 나누어보는 연습도 할 것.

내일은 함께 대형서점 같은 곳이라도 가볼까.

바바는 새해가 되었으니 운동을 꾸준히 하겠다고 했다.

비교당하길 즐기는 일. 지독한 상대적 우위에 취하여 위험천만한 칼춤 추기를 멈추지 않는한 나는 장차 내외적으로 크나큰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詩가 끊어지는 이유는 나의 마음이 애처롭지 않은 탓인가 혹은 그렇지 않다고 제멋대로 착각하는 탓인가?

마음은 이제는 흐른다기 보다는 막다른 목에 몰려 한없이 겁에 질려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닌가.

시를 쓸 떄 필요한 <그러한 그녀>를 위해서라도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서로에게 다가갈 길은 참으로 드물고, 서로에게 실망하거나 서운해 할만한 일들은 마치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아서 두려운 생각이 문득 앞섰다가 이내 다행히 괜찮아졌습니다. 한 때의 사랑은 단 한번도 이러한 사지를 예고한 적이 없건만 어느새 우리는 때로 이러한 사지를 헤매입니다. 괜찮다고 생각을 하다가도, 이따금 왜 그런지 지금 나의 배알을 꼴리게 하는 게 생기거나, 이상하게도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일들에 대해 나 역시 무의미한 저항을 끊어내지 않는 일이 당신으로 하여금 나의 눈치를 보고, 나의 또 다른 반응을 의식하게 만드는 일은 당신 뿐만 아니라 분명히 나의 이식까지 갉아먹는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나는 좀 잘 해보려고 합니다. 순응하고 귀 기울이고.... 아니되겠으면 이러한 나만의 백지로 도망을 치면되겠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고보니 아주 오래전부터 종이라는 공간은 나의 오랜 친구이자 도피처였으니 말입니다.

생각하건대 요지는 아마도 어줍잖지 않은, 대중과의 완벽한 단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늘 바랐습니다. 다만 인간은 어리석게도 끊임없이 더 많은 사랑을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기 위해 발버둥칩니다. 아니 그런데 어쩌면 나는 한때 그 누구에게도 긍정받을 수 없을만하지 않았나요?



이렇게 말하자면 이것은 약간의 비판적 고찰

시대의 풍랑에 집어삼켜지지 않으려면 두 가지 안목이 필요하다고 할 것인데, 하나는 자신만의 특수화된 자아를 확보할 것, 그리고 그러한 특수한 자아에 입각하여 자기 혼자만 그렇게 특수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자각할 것.

나나 바바 뿐만 아니라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가능한 이야기다. 사춘기에 겪는 풍파가 결국 저 두 안목 사이의 균형을 찾는 여정인 것이고, 사춘기의 질이 안목의 질과 균형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균형의 측면에 있어서 우리는 매우 좋다. 서로가 결여한 것을 서로가 채워줄 수 있는 관계에 있어서 균형을 맞추기 좋다. 다만 아쉬운 것은 질? 정확히는 시대적 좌절의 문제이다. 좌절은 스스로가 타자화시키는 대상, 혹은 나 스스로를 타자화시키는 주체(세력)을 전제로 한다. 그 대상과 범위가 우리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따.

때로 시대 안에서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과 불만을 우리는 번갈아가면서 느끼는 듯하다. 순간과 순간들이 모두 포개어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러한 최소한의 경험과 감정과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이를 만났다는 사실에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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